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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의 전설로 통하는 ‘빌 브래들리’를 필자는 정치인으로서 그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빌 브래들리는 듀크와 프린스턴에서 그리고는 뉴욕 닉스에서 농구선수로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지만, 그가 1978년 뉴저지 연방상원으로 진출하면서 워싱턴 정치인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은 농구선수로서의 그의 업적을 훨씬 능가한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관심을 집중시킨 분야는 ‘민권법안“이다. 그는 뉴욕과 뉴저지에서 농구선수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론 정치인으로의 꿈을 키웠다. 빈곤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인간이하의 슬럼가 사람들의 참상이 그를 늘 괴롭혔다. 더구나 1980년대 초반 레이건 행정부의 레이거노믹스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급격하게 삭감했다. 배고품에 허덕이는 극빈자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뉴욕의 할렘과 뉴저지의 뉴왁은 연일 살인과 방화 사건의 연속이었다. 극빈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정치권에서의 그의 발언이 서민층과 소수계의 심금을 울렸다. 빌 브래들리의 의정활동은 정치권 진출을 꿈꾸는 소수계들의 모범이 되었다. 2000년 대통령선거전에 출마하여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앨 고어를 크게 위협한 [브래들리 캠페인]은 지금도 소신정치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00년에 ”빌 브래들리“는 시작을 알렸고 2004년에 ’하워드 딘”은 시험대였다. 그리고 2008년에 와서야 “바락 오바마”가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민주당내 비주류의 주류획득의 과정이다. ‘빌 브래들리’의 정치철학과 캠페인 방식에 영혼을 빼앗겨서 그의 캠프에 뛰어든 가장 대표적인 (당시)정치지망생이 바로 에디슨시장 “최준희”다. 그는 훌 타임으로 브래들리의 전국 유세를 보좌했다. 잔심부름으로 시작한 그의 역할이 순식간에 핵심 브레인으로 브래들리의 측근이 되었다. 최준희는 일정을 관리하고 이슈를 정하고 발언의 수위를 결정하는 핵심 참모진에 들어가면서 브래들리와 인간적인 교감을 쌓았다. 그의 내심에는 “지금은 내가 브래들리를 위해서 다음엔 브래들리가 나를 위해서”라고 중얼거리면서 최선을 다했다. 브래들리 캠페인에서 최준희는 ‘배경과 기반이 없어도 정치세력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최준희는 첫 번째의 목표를 자기 지역인 미들섹스에서 주하원에 도전하는 것으로 정했다. 당의 후보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은 ‘Fundrasing(기금모금)’이다. 뉴욕지역만이 아니고 전국의 한인커뮤니티를 돌았다. 뉴욕과 LA의 한인사회가 최준희의 요청에 응하기엔 그가 너무 무명인사였고 지역정치에 대한 한인들의 관심이 너무나 바닥이었다. 한인 2세들과 아시안 영어권에 설득력 있게 진입했지만 주하원직에 도전할만한 기금을 모으기엔 역부족이었다. 2002년을 그는 그냥 넘겨야 했고 2004년 주하원선거전에서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기금모금에 응했던 후원자들을 생각해서도 그의 초조감은 더해만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에디슨 시장직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과잉 개발과 부패, 그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시의 예산적자가 에디슨 시민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당에 후보등록을 했고 과감하게 에디슨시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는 구세대정치인들의 관행이 부패와 부정의 온상이 되었다고 연일 지역미디어를 활용해서 선전했다. 순식간에 같은 문제를 갖고 있던 인근도시에 선거이슈로 번졌다. 최준희에 의해서 우드브릿지, 엘리자벳스, 뉴왁시, 저지시티까지 선거판의 현안이 ‘개혁“이 되었고 세대 교체의 요구가 풀뿌리 조직에서 나오게 되었다. 권력의 힘을 업고 있는 방송 매체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았다. ”저지가이 방송사건“이 그것이다. 더 심한 발언이 나오기까지를 지켜보면서 시민단체와 방송과의 전선을 만들어 냈다. 인종차별케이스로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전국의 미디어가 ”최준희후보“에 주목했다. 최준희는 미디어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기회를 틈타서 인지도를 만들었고 지지율을 높였다. 무명의 최준희가 선거판 미디어에 연일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주지사 후보인 코자인이 최준희의 유세를 지원 한다고 에디슨시를 방문했지만, 결론은 코자인이 최준희의 덕을 봤다“란 논평이 나오기까지 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일리노이 상원의원인(지금은 대통령이지만) 바락 오바마가 최준희 유세를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최준희 시장은 지난 만4년 동안 지역토박이들의 저항에 혹독하게 시달렸다. 개혁을 위해서 경찰직을 포함한 공무원수를 줄여야 했고, 권력과 유착한 개발회사들을 내 보내야 했다. 더구나 힘들었던 일은 시장과 밀착해서 오랫동안 각종 편의를 제공받던 동네 유지들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에디슨시의 민주당은 계속해서 최준희에게 개혁보다는 상황유지를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최준희는 거절했고 개혁을 밀어 부쳤다. 그의 가슴에는 에디슨시의 개혁을 통해서 보다 큰 정치인으로의 꿈이 부글부글 타 올랐던 것이다. 지난 3월18일 에디슨시의 민주당이 최준희에게 당의 공천을 주겠다고 ‘야합’을 신청했다. 당의 공천을 받아들이면 예비선거는 식은 죽 먹기다. 우선 그렇게 힘든 Fundrasing(기금모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최준희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 나는 시장이 목표가 아니고 에디슨시의 개혁이 목요다 ” 라고 했다. 2005년 선거판을 들먹이면서 다시한번 미디어가 최준희의 개혁의지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자신이 민주당 시장이지만 에디슨시의 민주당이 개혁대상이라고 설정을 했는데 야합은 정치적으로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을 개혁하고 개혁된 당의 후보가 되는 것이 큰 정치인의 행보라는 것을 최준히는 브래들리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것이 오바마 코드이다. 최준희 시장의 행보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결정적일 때에 그가 프로 정치인으로서의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난 예비선거전에서 당의 야합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시장직 이상으로 진출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뒤로는 야합을 한다는 미디어의 비판이 평생 그를 따라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은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고 정당한 큰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최준희의 예비선거전의 패배이다. 12월31일 최준희 에디슨시장의 임기가 끝난다. 그동안 “한인시장”이라는 말이 2세들에게 얼마나 중요(의미)하게 영향을 주었는가?“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인정치인을 만들어 내는 일은 그래서 한인사회의 희망을 만들어 내는 우리 모두의 일이다. |